광고판에서 요즘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숫자가 하나 있다. 30만. 유니레버가 마케팅에 동원하고 있다는 크리에이터의 규모다. 숫자만 보면 어리둥절하다. 도대체 한 회사가 어떻게 30만 명과 함께 일한다는 걸까. 이 글에서는 그 숫자 뒤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업계가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정리해본다.

유니레버라는 회사
먼저 배경부터. 유니레버는 도브, 렉소나, 액스(한국에서는 럭스·바세린 등도 익숙하다)를 비롯해 개인 케어부터 식품, 홈 케어까지 아우르는 세계 최대급 생활소비재(FMCG) 기업이다. 수십 개 국가에서 수십 개 브랜드를 동시에 운영한다는 점이 이 이야기의 출발점이자 핵심이다. 하나의 거대한 마케팅이 아니라, 시장마다 브랜드마다 다른 판을 동시에 벌여야 하는 회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변화의 방아쇠를 당긴 인물은 2025년 3월 취임한 CEO 페르난도 페르난데스다. 그는 취임 직후부터 "덩치 큰 기업 광고의 시대는 끝났다"는 취지의 발언을 반복해왔다. 소비자들이 브랜드가 직접 말하는 메시지보다 크리에이터와 커뮤니티의 추천을 더 신뢰하게 됐다는 진단이었다. 전통적인 브랜드 메시지에만 기대는 대신, 유니레버는 크리에이터를 마케팅의 핵심 동력으로 삼겠다는 방향을 분명히 했다.
이 방향은 돈의 흐름으로도 확인된다. 페르난데스는 소셜 채널과 크리에이터 파트너십에 배정하는 미디어 투자 비중을 30%에서 50%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그가 자주 쓰는 표현 중 하나가 인상적이다. "전 세계 모든 우편번호 구역마다 인플루언서를 두고 싶다"는 것. 브라질이나 인도처럼 큰 시장의 동네 단위까지 파고들겠다는 하이퍼로컬 전략이다.
왜 하필 30만인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굳이 이렇게까지 많아야 할까.
페르난데스의 논리는 콘텐츠의 수명에 있다. "영상 한 편의 수명은 나흘"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짧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콘텐츠를 끊임없이 새로 찍어내려면, 소수의 유명인이 아니라 방대한 창작자 군단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광고 한 편을 크게 만드는 시대에서, 잔잔한 콘텐츠를 쉼 없이 흘려보내는 시대로 옮겨가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경쟁 구도도 무시할 수 없다. 개인 케어 부문의 성장·혁신 책임자 라니 알 하지는 코카콜라, 아디다스, 버드와이저 같은 선수들과 붙으려면 판을 크게 키울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유니레버보다 훨씬 오래, 훨씬 능숙하게 이 게임을 해온 상대들이다.
흥미로운 건 유니레버 혼자만의 움직임이 아니라는 점이다. 칸 라이언즈 2026 무렵 유니레버와 로레알 두 회사만 합쳐도 인플루언서 네트워크가 100만 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대형 브랜드들의 예산이 창작자 경제로 쏠리는 흐름이 그만큼 거세다는 뜻이다.
월드컵이라는 시험대
이 전략이 처음으로 대규모로 시험대에 오른 무대가 2026 FIFA 월드컵이었다. 유니레버는 이를 회사 역사상 최대 규모의 스포츠 파트너십 활성화라고 표현했다.
규모부터 압도적이다. 도브, 도브 맨플러스케어, 렉소나, 액스를 포함한 35개 이상의 개인 케어 브랜드가 120개가 넘는 시장에서 캠페인에 참여했고, 5만 명 규모의 크리에이터가 여기에 동원됐다. 실적 발표에서 유니레버는 이 5만 명의 합산 도달 규모가 6억 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콘텐츠를 관리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유니레버는 '라커룸(Locker Room)'이라는 24시간 콘텐츠 허브를 유튜브와 틱톡에 열어, 경기 중 터지는 순간들을 실시간으로 낚아채 자사 브랜드를 대화에 계속 끼워 넣으려 했다. 소셜미디어의 공유 문화와 TV의 정서적 파급력을 하나로 묶겠다는 게 캠페인의 목표였다.
마케터들의 시선: "그거 진짜 다 굴러가는 거 맞아?"
화려한 숫자 뒤로, 업계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갈린다.
먼저 '숫자의 실체'를 향한 의심이다. 한 회사가 30만 명과 동시에 협업한다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하냐는 것이다. 실제로 30만이라는 숫자는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단일 네트워크라기보다, 브랜드별·시장별로 쪼개진 수많은 소규모 그룹의 총합에 가깝다. 영향력 큰 대형 크리에이터는 장기 파트너로, 팔로워 수천 명 규모의 소형 크리에이터는 물량과 확산용으로 쓰는 식이다. 결국 관전 포인트는 숫자 자체가 아니라, 각 브랜드의 목표에 이들이 실제로 얼마나 기여하느냐다.
두 번째는 '운영의 무게'다. 섭외부터 계약, 브리핑, 크리에이티브 검수까지, 크리에이터 한 명을 제대로 굴리는 데 들어가는 손이 만만치 않다. 이걸 수천, 수만 명으로 늘리면 회사 내부의 일하는 방식 자체가 흔들린다. 스케일은 말로는 매력적이지만, 한 겹만 들추면 조직이 감당해야 할 실무의 부담이 그대로 드러난다.
자동화가 답일까, 함정일까
이 부담을 덜어주는 열쇠로 지목되는 게 AI 자동화다. 크리에이터를 찾고 매칭하고 관리하는 과정을 도구로 처리하면 효율이 확 오른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이를 인플루언서 업무의 '배관 공사'가 한 단계 진화한 것으로 본다.
다만 그늘도 뚜렷하다. 첫째, 모두가 비슷한 도구로 비슷한 조건을 검색하면 결국 같은 크리에이터들만 반복해서 발굴하게 된다. 둘째, 더 위험한 건 알고리즘이 놓치는 사람들이다. 지금 가장 빛나는 창작자 중 상당수는 반년 전이라면 어떤 순위표에도 없었을 이름들이다. 창의적 발상은 스프레드시트가 아니라 예상 밖의 추천, 하룻밤 새 터진 트렌드, 오랜 시간 쌓인 관계에서 나온다. 경직된 워크플로우에 이 과정을 다 맡기면, 정작 가장 좋은 협업의 씨앗을 놓칠 수 있다는 경고다.
콘텐츠 자체의 균질화도 걱정거리다. 브랜드 가이드라인과 캠페인 목표에 30만 명을 맞추다 보면, 오히려 모든 콘텐츠가 평균값으로 수렴하는 역설이 생긴다. 그래서 캠페인을 시작하기 전에 크리에이티브 방향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해두느냐가 승부를 가른다.
그래서 이게 돈이 되긴 하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이 거대한 베팅이 실제 매출과 이익으로 이어지고 있느냐다.
유니레버의 2026년 1분기 실적을 보면 기저 매출은 3.8% 성장했고, 이 중 2.9%가 물량 증가에서 나왔다. 숫자는 나쁘지 않은 방향이다. 브랜드·마케팅 투자도 2025년 기준 매출의 16.1%까지 올라, 4년 만에 약 300베이시스포인트 상승했다. 문제는 이 성장 중 정확히 얼마가 크리에이터 전략 덕분인지를 외부에서 딱 잘라 가려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인플루언서가 실제로 매출과 이익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추적하는 명확한 '돈의 길'은 아직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정리하며
유니레버의 30만 크리에이터 실험은 인플루언서 마케팅이 도달한 새로운 스케일을 상징한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30만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그 아래에 깔린 구조에 있다.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쪼개진 네트워크, 이를 떠받치는 AI 인프라, 그리고 효율을 높이는 만큼 창의성과 다양성을 깎아낼 수 있다는 근본적인 긴장. 규모는 분명 경쟁의 무기지만, 동시에 모든 콘텐츠를 평균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이기도 하다.
PR과 커뮤니케이션 업계 입장에서 이 사례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크리에이터를 몇 명 확보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이룰 것이냐. 숫자 경쟁의 시대일수록, 오히려 전략과 진정성이 갈림길을 만든다.